「
常識を
疑ってみる」という
行為、それこそが
学問の
原点にほかならない。
상식을 의심하는 행동이야말로 학문의 출발점이다.
もし「
勉強」が「
強いられて
勤める」という
受動的な
行為であるとすれば、「
学問」とは「
問いを
立てて
学ぶ」――つまり
自らを
媒介として
世界に
問いかける
能動的な
営みにほかならない。
만약 학습이 수동적인 행위이며 강제로 하게 되는 것이라면, 학문이란 배우기 위해 질문을 세우는 것, 즉 자기 자신을 통해 세계에 질문을 던지는 능동적인 활동입니다.
私たちは、
主体的に
問うという
行為を
通して、
従来「
常識」とされてきたものの
見方を
相対化し、ときにそれをずらすことによって、
新たな
視点を
見出さずにはいられない。
질문을 적극적으로 하는 행동을 통해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겨져 온 시각을 다시 바라보고, 때로는 그것을 흔들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学問における「
正解」は
決してひとつに
限られるものではなく、それどころか、「
正解」とは
何かを
問う
姿勢そのものにこそ、
学問の
本質が
宿っていると
言っても
過言ではない。
학문에서 정답은 결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답이란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묻는 자세야말로 학문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学ぶとは、
単に
知識量を
増やすことにとどまらず、ましてやテストで
得た
知識を
吐き
出す
作業にすぎないわけでもない。
학습은 단순히 지식을 늘리는 것만이 아니며, 더군다나 시험에서 배운 지식을 쏟아내는 것만도 아닙니다.
それはむしろ、
得られた
知を
自らの
文脈において
再構成し、その
過程で
自分自身のものの
見方、ひいては
自己の
尺度そのものが
変容せざるを
得ないような
体験なのである。
반대로, 그것은 자신의 맥락 속에서 받아들인 지식을 재구성하는 경험이며, 그 과정에서 사물에 대한 시각이나 때로는 자기 자신의 기준마저도 바꿀 수밖에 없게 됩니다.
この
変化を
通してこそ、
思いがけない
発見や
独創的なアイデアが
生まれるに
違いない。
이 변화 덕분에 분명히 예상치 못한 발견이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탄생할 것입니다.
「
疑う」という
言葉には、
一般に
否定的な
響きが
伴う。
의심하다라는 단어는 종종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
人を
疑う」と
言えば、
多くの
場合、「その
人を
信用しない」という
意味にほかならない。
타인을 의심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경우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私自身も、
人を
疑って
生きるよりは、できる
限り
人を
信じて
生きていきたいと
思っている。
저는 저 자신도 의심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믿고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しかしながら、
社会の
中で
当たり
前とされている
事柄に
対しては、ときに
疑いの
目を
向けざるを
得ない
場面があるのも
事実である。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때때로 사회에서 당연시되는 것들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
常識だから」という
一言で
思考を
停止し、
安易にそれを
受け
入れてしまうことの
危うさは、
誰しもが
自覚すべきだろう。
모두가 그게 당연하니까라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멈추고, 사물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의 위험성을 인식해야 합니다.